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생애 (문단 편집) === 유럽 순방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쇼와 천황 영국군복.jpg|width=100%]]}}}|| || [[영국 육군]] 정복을 입은 모습. || [clearfix] 아버지 [[다이쇼 덴노]]의 병이 날로 급속히 악화되고 있던 가운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황태자 [[히로히토]]를 유럽에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미래의 [[천황|덴노]]가 될 히로히토가 견문을 넓히고, 유럽 국가들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 등 여러 인사들이 찬성을 표하였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다이쇼 덴노가 병상에 누워 있는 와중에 아들인 히로히토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불효(不孝)'라는 주장도 있었고, 유럽에서 테러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히로히토의 어머니인 데이메이 황후도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유럽 방문 계획에 우려를 표하였다.[* 계획을 제안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데이메이 황후와 사이가 나빴던 점도 있다.] 원로들은 황후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고, 결국 요양 중이었던 다이쇼 덴노를 직접 찾아가 허락을 받아낸다. 유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히로히토는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 [[파일:631px-Crown_Prince_Hirohito_and_Lloyd_George_1921.jpg|width=100%]] || [[파일:쇼와 조지5세.jpg|width=100%]] || || [[1921년]], [[영국]]을 방문한 히로히토와 영국 수상이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로이드 조지]][* 왼쪽에서 두번째][br][[https://youtu.be/rBeElh81rBQ|당시 영상]] || 같은 시기, 히로히토와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5세]]. || || [[파일:히로히토 에드워드 01.jpg|width=100%]] || [[파일:히로히토 에드워드 02.png|width=100%]] || ||<-2> 당시 일본의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와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8세|에드워드]][* 나이는 에드워드가 히로히토보다 7살 더 많았지만, 둘 다 자신의 나라의 차기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이후 약 50년 뒤인 [[1971년]]에 또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 히로히토는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순방했다. 특히 영국과는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은터라, 우호국의 국빈으로서 히로히토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국왕인 [[조지 5세]]는 히로히토를 "나의 아들과도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아껴주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조지 5세의 아들 세대가 양국의 군주가 된 시기에는 영국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과 [[추축국]]이 되어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영국 국왕]]은 조지 5세의 아들인 [[조지 6세]]였다.] 히로히토도 일본 안에서만 지내다가 처음 해외를 나와서 감회가 남달랐는지, 이 시기가 자신에게 가장 자유로웠고 즐거웠던 시기였다고 훗날 회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 순방 전에는 다이쇼 덴노의 그늘 아래서 미온적으로나마 존재해 존재감이 없던 히로히토가 유럽 순방과 각국 유럽 정상들과 회담을 통해 세계적인 인기 황태자로 급부상하여 일본의 황태자, 인기스타로 돌아온 것을 실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